사람을 그려 보라고 하면 대개 먼저 윤곽선을 긋는다. 얼굴의 테두리, 어깨의 곡선, 팔의 경계를 선으로 둘러 놓고 그 안을 채운다. 그런데 조르주 쇠라의 그림을 가까이 보면 그 선이 잘 보이지 않는다. 사람의 모양은 분명한데 모양을 둘러싼 선은 없다. 쇠라의 그림에서 선은 어디로 갔을까.
이 글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퍼블릭 도메인으로 공개한 쇠라의 작품 네 점을 그린 순서대로 본다. 10대에 앵그르를 베낀 연필 소묘, 20대 초의 콩테 크레용 소묘 두 점, 그리고 점으로 칠한 유화 한 점이다. 다 읽고 나면 어떤 그림의 테두리 앞에서든 두 가지를 스스로 확인할 수 있다. 이 경계는 선으로 그은 것인가, 두 밝기가 맞닿은 자리인가. 그리고 선이 남아 있다면 그 대상은 원래 가는 것인가.
조르주 쇠라(1859–1891)는 파리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세상을 떠난 프랑스 화가다. 서른한 살에 죽었으니 여기서 볼 네 점은 길지 않은 경력의 처음과 한가운데에 놓인다.
10대 후반: 앵그르를 베낀 손
메트의 설명에 따르면 젊은 쇠라는 다른 어떤 화가보다 앵그르를 많이 따라 그렸다. 이 종이는 루브르에 있는 앵그르의 《호메로스 예찬》에서 화면 왼쪽 아래에 놓인 화가 푸생의 손만 떼어 연필로 옮긴 것이다. 쇠라는 종이에 "여기에 천재가 있다(voila le génie)"라고 적어 두었다.

종이를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보면 흥미롭다. 다 그린 부분인 손은 선보다 음영으로 서 있다. 손등은 연필을 가볍게 눕혀 문지른 회색으로 둥글게 부풀고, 손가락 마디 끝의 밝은 점은 종이를 칠하지 않고 남긴 자리다. 손이 쥔 물체의 그늘은 촘촘한 빗금으로 가장 어둡게 눌렀다. 손가락의 바깥 테두리도 따로 그은 선이라기보다 밝은 손과 어두운 그늘이 만나는 경계다.
반대로 덜 그린 부분, 왼쪽의 소매와 종이 아래 절반에는 가는 선만 남아 있다. 선은 여기서 형태를 잡아 두는 뼈대이고, 그림이 완성될수록 음영 밑으로 사라진다. 앵그르를 베끼던 10대의 종이에서도 이미 그렇다.
1882–83년 《자수; 화가의 어머니》: 선 없이 그린 얼굴
몇 년 뒤 쇠라는 연필 대신 콩테 크레용을 들었다. 메트는 이것을 쇠라가 가장 즐겨 쓴 소묘 재료라고 소개한다. 그는 자수를 놓는 어머니 에르네스틴 페브르를 그렸다. 메트는 이 그림이 "선 없이, 전부 벨벳 같은 검은 덩어리로" 그려졌다고 설명한다.

화면에서 밝은 곳은 세 군데뿐이다. 오른쪽 위에서 오는 빛을 받은 머리 윗부분이 활처럼 둥글게 빛나고, 콧날이 짧은 세로 획처럼 밝으며, 턱 아래 흰 깃이 가장 밝다. 그 사이의 얼굴은 거의 배경과 같은 어둠이다. 특히 머리의 왼쪽 절반을 따라가 보면, 어디가 머리이고 어디가 벽인지 정할 수 있는 지점이 없다. 머리는 테두리로 닫혀 있지 않고, 빛이 닿은 부분만 어둠에서 떠오른다.
밝기를 만드는 방법도 선과 반대다. 메트는 크레용을 누르는 힘을 줄여 빛을 냈다고 적는다. 확대해 보면 회색 부분에서는 검정 사이로 종이 결이 흰 점처럼 촘촘히 비치고, 가장 검은 부분에서는 그 점이 거의 메워져 있다. 이 그림의 밝음은 칠한 흰색이 아니라 덜 덮은 종이다. 동료 화가 폴 시냐크는 이런 소묘를 두고 "지금까지 있었던 화가의 소묘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고 했다.
1883년 살롱의 《아만장》: 옆얼굴의 테두리는 어디 있나
같은 무렵 쇠라는 친구이자 화가인 에드몽프랑수아 아만장(1858–1936)의 옆모습을 그렸다. 두 사람은 파리의 미술 학교에서 함께 공부했고 1879년에는 작업실을 같이 썼다. 이 그림은 습작이 아닌 완성작으로 1883년 파리 살롱에 걸렸고, 스물세 살의 쇠라가 처음으로 공개 전시에 내놓은 작품이 되었다. 높이 62cm로, 앞의 어머니 그림보다 두 배쯤 크다.

옆얼굴은 초상화에서 윤곽선이 가장 일하기 좋은 자세다. 이마에서 코끝, 입술, 턱으로 이어지는 한 줄만 그어도 얼굴의 생김새가 드러난다. 그런데 이 그림을 확대해 이마와 코의 경계를 보면, 그 한 줄이 없다. 회색 얼굴과 그보다 조금 밝은 회갈색 배경이 맞닿아 있을 뿐이고, 경계에서 크레용의 짙기가 한 단계 바뀐다. 머리카락의 위쪽 끝은 아예 배경 속으로 부스스 풀린다.
그래도 옆모습은 흐리지 않다. 오히려 단단한 덩어리처럼 보인다. 검은 웃옷과 머리가 화면 왼쪽을 크게 차지하고, 셔츠 깃의 흰 띠와 얼굴의 회색이 그 덩어리에서 단계적으로 밝아진다. 선 대신 밝기의 계단이 모양을 붙잡는다.
이 그림에서 선에 가장 가까운 자국은 오른쪽 아래, 밝은 손이 쥔 가는 막대다. 손에서 왼쪽으로 뻗은 어두운 가로 획 하나로 그렸고, 끝으로 갈수록 가늘어지며 흐려진다. 대상 자체가 가늘고 길 때만 선이 나타난다. 이 원칙은 뒤의 유화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뵐플린의 "선적인 것과 회화적인 것"으로 다시 보기
미술사학자 하인리히 뵐플린은 1915년에 낸 『미술사의 기초 개념』에서 양식의 차이를 다섯 쌍의 개념으로 정리했다. 그 첫 쌍이 선적인 것과 회화적인 것이다. 선적인 방식은 사물을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처럼 윤곽과 면으로 붙잡아 사물의 경계에 무게를 두고, 회화적인 방식은 눈에 보이는 겉모습에 몸을 맡겨 경계를 풀어 버린다. 뵐플린은 이것을 "선 대신 얼룩으로 보는" 방식이라고도 불렀다.
뵐플린이 이 개념을 쓴 대상은 쇠라가 아니라 16세기와 17세기 유럽 미술의 차이였다. 그러니 이것은 쇠라를 이 틀에 집어넣는 일이 아니라, 이 한 쌍을 렌즈로 빌려 쓰는 일이다. 렌즈를 대 보면 쇠라는 어느 한쪽에 서지 않는다. 그의 형태는 선적인 그림처럼 닫혀 있고 또렷하다. 아만장의 옆모습도, 어머니의 흰 깃도 주변과 섞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 형태를 만든 재료는 회화적인 그림처럼 오직 밝기의 얼룩이다. 쇠라는 선적인 형태를 선 없이 만든다.
1887–88년 《서커스 퍼레이드》: 선은 점 밑에 숨었다
마지막은 높이 약 1m, 너비 약 1.5m의 유화다. 메트에 따르면 쇠라의 첫 밤 장면이자 대중 오락을 다룬 첫 그림으로, 1887년 봄 파리 동쪽에서 열린 정기 장터에 선 코르비 서커스의 퍼레이드를 그렸다. 퍼레이드는 천막 밖 무대에서 공짜로 보여 주는 맛보기 공연이다. 1888년 앵데팡당전에 처음 걸렸다.

가운데 트롬본 연주자를 확대해 보면 그의 테두리는 선이 아니라 띠다. 원뿔 모자의 짙은 남보라 점들이 주황빛 배경의 점들과 몇 점 너비에 걸쳐 섞이다가 끝난다. 화면 아래 구경꾼들의 머리도 마찬가지다. 짙은 파랑 점이 모인 곳이 머리이고, 점이 성겨지며 주황이 섞이는 곳이 경계다. 메트의 기술 조사 기록은 이 점 그림이 밤에 보는 사물의 부드러운 가장자리를 나타내기에 특히 잘 맞았다고 적는다. 검게 보이는 붓 자국도 실제로는 주로 아주 곱게 간 코발트 블루였다.
그렇다면 선은 아예 없었을까. 같은 기록에 답이 있다. 2016년 조사에서, 쇠라가 색 분필로 가로 6칸, 세로 4칸의 격자를 캔버스에 긋고, 일부 인물의 윤곽은 묽게 푼 프러시안 블루 물감으로 그렸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혀졌다. 그 위에 처음에는 큰 점과 짧은 획을 성기게 놓고, 점점 작은 점으로 덮어 나갔다. 선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점 밑에 묻혔다. 연필 소묘에서 음영 밑으로 사라지던 뼈대가 여기서는 물감 층 아래에 있다.
표면에 선이 그대로 드러난 곳도 있다. 왼쪽 나무의 가는 파란 가지, 악사들 앞을 가로지르는 난간, 트롬본 연주자 오른쪽 위에서 가스관을 천막에 잇는 비스듬한 막대다. 모두 대상 자체가 가늘고 긴 것들이다. 아만장이 쥔 막대처럼, 쇠라는 가는 것만 선으로 그렸다.
그림 앞에서 확인할 것
네 점을 지나오며 선이 간 곳은 세 군데였다. 완성되지 않은 부분의 뼈대로 남거나, 음영과 물감 층 아래에 묻히거나, 원래 가는 대상 위에만 드러났다. 그 밖의 모든 테두리는 두 밝기가 맞닿은 자리다.
다음에 어떤 그림이든 테두리 하나를 골라 오래 보자. 그 자리에 경계만을 위한 자국이 따로 있는지, 아니면 안쪽과 바깥쪽의 밝기가 바뀌는 것뿐인지. 선이 보인다면 그것이 나뭇가지나 막대처럼 원래 가는 것인지도 함께 묻자. 이 두 질문이면 선으로 생각하는 화가와 덩어리로 생각하는 화가를 꽤 정확히 가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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