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번은 서머싯 몸의 장편 『인간의 굴레에서』 첫째 권이다. 주인공 필립 케어리는 한쪽 발이 굽은 채 태어났고, 소설 첫머리부터 그 발 때문에 놀림을 받는다. 그래서 제목의 ‘굴레’를 그 발로 읽기 쉽다. 그런데 책장을 넘길수록 필립을 묶는 것은 하나씩 늘어나고, 나중에는 발보다 훨씬 단단한 것이 나타난다. 이 글을 읽고 나면 소설 앞 절반에서 필립을 묶는 네 가지를 장 번호와 함께 짚을 수 있고, 제목과 같은 말을 쓰는 철학책 한 권을 옆에 두고 읽는 방법을 알 수 있다.
어떤 책인가
민음사판은 송무가 옮겼고, 1권은 1998년 8월, 2권은 같은 해 9월에 나왔다. 1권은 588쪽으로 작가의 머리말과 본문을 담고, 2권 끝에 옮긴이 해설과 작가 연보가 붙는다. 원작은 1915년에 나온 장편이며 122개의 장으로 되어 있다. 출판사 페이지는 1권이 몇 장에서 끝나는지 밝히지 않으므로, 이 글은 원작의 장 번호를 기준으로 앞쪽 절반에 해당하는 장면만 다룬다.
출판사는 이 소설을 젊은이가 인생과 사회에 눈떠 가는 과정을 그린 교양소설로 소개하고, 몸이 특출한 사람보다 보통사람을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점을 특징으로 꼽는다. 작가 소개에 따르면 몸은 여덟 살에 어머니를, 열 살에 아버지를 잃고 숙부 밑에서 캔터베리의 학교를 다녔으며, 런던의 의학교를 졸업했다. 소설 속 필립도 아홉 살에 어머니를 잃고 목사인 큰아버지 집에서 자라며, 나중에 런던의 의학교에 들어간다. 출판사가 ‘자전적 소설’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독서 노트
필립 케어리가 지나는 자리
원작 122장 가운데 앞쪽 절반
어린 시절 · 1~21장
- 1885년 런던, 아홉 살에 어머니를 잃는다
- 큰아버지의 목사관, 터캔베리 기숙학교
하이델베르크 · 22~31장
- 독일어를 배우러 간 곳
- 신앙을 내려놓는다(28장)
런던 회계 사무소 → 파리 · 36~52장
- 회계사 수습을 그만두고 그림 공부
- 크론쇼, 패니 프라이스, 스승 푸아네
런던 성 루가 병원 의학교 · 54장~
- 아버지가 다녔던 의학교
- 찻집 종업원 밀드레드를 만난다(55장)
장 번호는 영어 원작 기준 · 민음사판 1·2권의 경계는 출판사 페이지에 없음
제목과 같은 말을 쓰는 책
영어 제목 ‘Of Human Bondage’는 스피노자 『에티카』 4부의 영어 제목과 같은 말이다. 엘위스의 영어 번역에서 4부는 「인간의 굴레에 대하여, 또는 감정의 힘에 대하여」라는 제목을 달고 있고, 머리말 첫 문장은 굴레를 이렇게 정의한다. 감정을 다스리고 억제하지 못하는 인간의 무력함을 나는 굴레라고 부른다. 감정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기 자신의 주인이 아니라 운에 휘둘리며, 더 나은 것을 보면서도 더 나쁜 것을 따르도록 내몰리기 때문이다.
소설 안에도 스피노자가 나온다. 53장에서 철학책을 탐독하던 필립은 스피노자에게서 그토록 고결하고 다가가기 어려운 정신을 처음 만났다며 경외감을 느낀다. 이 정의를 머릿속에 넣고 읽으면, 필립이 무엇에서 벗어나고 무엇에 다시 붙잡히는지가 또렷하게 보인다.
필립을 묶는 네 가지
굽은 발. 기숙학교 아이들은 운동장에서 필립의 걸음걸이를 흉내 내며 논다. 14장에서 필립은 성경의 ‘믿음이 있으면 산도 옮긴다’는 구절을 붙들고, 학교로 돌아가기 전날 밤 추운 방에서 맨몸으로 무릎을 꿇고 발이 낫기를 기도한다. 다음 날 아침 발은 그대로다. 큰아버지는 그건 믿음이 모자라서라고 말하고, 필립은 다시 기도하다가 부활절 전에 그만둔다.
신앙. 독일어를 배우러 간 하이델베르크에서 필립은 신을 믿지 않게 된다. 28장에서 그는 지옥불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 것을 느끼며, 원문의 표현대로라면 마침내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스피노자의 정의와 정확히 반대되는 말이다. 몸은 이 해방감에 단서를 붙인다. 필립은 오랜 습관대로 신이 사라진 것을 신에게 감사하고, 그 뒤에도 문득문득 지옥에 대한 공포에 식은땀을 흘린다.
독서 노트
필립을 묶는 네 가지
몸에서 마음으로 옮겨 가는 굴레
굽은 발
- 기도해도 낫지 않는다(14장)
- 아이들의 놀림과 남의 시선
신앙
- 지옥에 대한 두려움
- 버린 뒤 "마침내 자기 자신의 주인"(28장)
화가가 되겠다는 꿈
- 패니 프라이스의 죽음(48장)
- 푸아네: 평범함을 넘지 못한다(51장)
감정
- 밀드레드와 있어도 불행, 떨어져도 불행
- 스스로를 경멸하면서도 끊지 못한다(57~59장)
줄거리는 영어 원작(프로젝트 구텐베르크)과 대조
화가가 되겠다는 꿈. 런던의 회계 사무소 수습을 그만두고 파리에서 그림을 공부하는 동안, 필립 곁에서 재능을 굳게 믿던 가난한 화학생 패니 프라이스가 방세도 내지 못한 채 목숨을 끊는다(48장). 51장에서 스승 푸아네는 필립의 그림을 보고 손재주는 있지만 재능은 보이지 않는다고, 평범함을 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곧이어 큰어머니의 부고를 받고 영국으로 돌아간 필립은 그림을 접고, 아버지가 다녔던 의학교에 들어가기로 한다.
감정. 앞의 세 가지는 필립이 어떻게든 내려놓는다. 넷째는 다르다. 런던으로 돌아와 의학교에 다니던 필립은 55장에서 찻집 종업원 밀드레드를 만난다. 그녀는 손님에게 무례하고, 필립은 처음에 그 이름조차 거들먹거린다며 싫어한다. 그런데 57장에서 그는 그녀와 함께 있으면 행복하지 않고, 떨어져 있으면 불행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59장에서는 그녀의 점잔 빼는 말버릇과 외모을 하나하나 경멸하면서도 그런 그녀를 사랑하는 자신을 혐오한다. 더 나은 것을 보면서 더 나쁜 것을 따르는 사람, 스피노자가 굴레라고 부른 바로 그 상태다.
긴 소설을 어떻게 나눠 읽을까
두 권을 합쳐 1,100쪽이 넘는 소설은 한 번에 읽기에 길다. 필립이 머무는 장소가 바뀌는 곳에서 끊으면 앞 절반이 자연스럽게 나뉜다. 런던과 블랙스터블에서 보내는 어린 시절(1~21장), 하이델베르크(22~31장), 블랙스터블과 런던의 회계 사무소(32~38장), 파리(39~52장), 그리고 런던의 의학교(54장부터)다. 한 구간을 끝낼 때마다 필립이 그곳에서 무엇을 내려놓고 무엇을 새로 얻었는지 한 줄로 적어 두면, 다음 구간에서 같은 문제가 모양을 바꿔 돌아오는 것이 보인다.
읽으면서 접어 둘 장면
1권에는 뒤에서 다시 돌아오는 장면이 몇 개 있다. 14장의 기도는 필립이 실패를 ‘내 믿음이 모자라서’로 해석하는 습관의 출발점이다. 28장의 해방감은 밀드레드 장면과 나란히 놓고 읽으면, 같은 사람이 같은 책 안에서 ‘자기 자신의 주인’이 되었다가 다시 그 자리를 잃는 과정이 보인다.
45장도 표시해 둘 만하다. 파리의 카페에서 필립이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자, 시인 크론쇼는 클뤼니 박물관의 페르시아 양탄자를 보러 가라고, 언젠가 답이 떠오를 것이라고만 말한다. 필립은 수수께끼 같다고 투덜거리고, 소설은 이 질문의 답을 한참 뒤로 미룬다. 1권을 덮을 때 이 질문이 아직 풀리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 두면, 2권에서 필립이 같은 양탄자로 돌아오는 장면을 놓치지 않는다.
독서 노트
읽으면서 표시해 둘 세 곳
1권에서 던져지고 뒤에서 돌아오는 장면
14장 · 산을 옮기는 믿음
- 필립은 발이 낫기를 기도한다
- 실패를 "믿음이 모자라서"로 배운다
28장 · 자기 자신의 주인
- 신을 버린 날의 해방감
- 스피노자 4부 머리말과 겹쳐 읽기
45장 · 페르시아 양탄자
- 삶의 의미를 묻자 크론쇼가 낸 수수께끼
- 답은 뒤로 미뤄진다
읽기 안내 · 장 번호는 영어 원작 기준
1권을 읽는 동안 장마다 한 줄씩 적어 보자. 지금 필립을 붙잡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몸 밖에서 오는가 안에서 오는가. 발과 신앙과 화가의 꿈은 차례로 정리되지만, 마지막 칸에 남는 것은 필립이 스스로 붙잡고 놓지 못하는 감정이라는 것이 보인다.
이 기록에 대화를 더해 주세요.
궁금한 점, 다른 접근, 직접 해 본 결과를 나눠 주세요.
로그인 상태 확인 중…
댓글을 불러오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