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옷, 쌓인 눈, 햇빛을 받은 대리석. 그림에서 가장 밝은 자리는 흰 물감으로 칠했으리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존 싱어 사전트의 그림을 확대해 보면 그 흰색에는 보라와 황토가 섞여 있거나, 아예 아무것도 칠해져 있지 않다. 그렇다면 그림 속 흰색은 무엇으로 만든 걸까.
이 글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퍼블릭 도메인으로 공개한 사전트의 그림 네 점을 그린 순서대로 본다. 앞의 두 점은 유화, 뒤의 두 점은 수채화다. 다 읽고 나면 그림 속 흰 자리 앞에서 세 가지를 스스로 물을 수 있다. 그 흰색에 어떤 색이 섞였는가, 물감을 위에 얹은 것인가 바탕을 아래에 남긴 것인가, 그리고 작품 기록의 재료란은 무엇이라고 적었는가.
존 싱어 사전트(1856–1925)는 피렌체에서 태어나 런던에서 세상을 떠났고, 메트는 그를 미국 화가로 분류한다. 이 글의 네 점은 주문받은 그림이 아니다. 기분 전환으로 그린 스케치, 가족과의 산책, 여행지에서 빠르게 그린 수채화다.
《눈 속의 마네킹》: 흰 눈은 몇 가지 회색일까
메트의 설명에 따르면 사전트는 1891년에서 1893년 무렵, 영국 글로스터셔의 페어퍼드에서 동료 화가 에드윈 오스틴 애비와 함께 벽화 주문을 위해 작업실을 빌려 쓰고 있었다. 어느 날 두 사람은 기분 전환 삼아 마네킹 하나를 눈밭에 세우고 작업실 창에서 유화 스케치를 그렸다. 비평가 로열 코티소즈의 회고로는, 애비는 그 마네킹을 망토와 깃털 모자를 쓴 중세 음유시인으로 살려 냈고(그 그림은 행방을 모른다), 사전트는 눈앞에 선 생기 없는 인형을 그대로 그렸다.

화면의 절반 가까이가 눈이다. 그런데 이 눈밭에는 순백이 거의 없다. 넓은 면은 옅은 보랏빛이 도는 회색으로 칠해졌고, 지붕에 쌓인 눈과 하늘이 거의 같은 밝기여서 지붕의 경계는 어두운 선 몇 개로만 갈린다. 가장 희고 두꺼운 물감은 왼쪽 돌담 위에 짧게 얹힌 눈 몇 줄에 있다. 발자국은 푸른 검정과 포도주빛 갈색의 짧은 붓 자국이고, 멀어질수록 옅은 회보라 점선이 된다. 화면에서 가장 강한 색은 마네킹의 붉은 망토이고, 그 옆에서 눈은 더 차갑게 보인다. 캔버스 왼쪽 끝에는 물감이 덮지 않은 누런 바탕이 좁게 드러나 있어, 이 회색 눈이 그 바탕 위에 칠한 것임을 알려 준다.
《양산을 든 두 소녀》: 흰 치마에 들어간 색
메트에 따르면 사전트는 1885년부터 지베르니에 있는 클로드 모네의 집을 자주 찾았고, 그 뒤 몇 년 동안 인상주의 방식의 풍경과 인물을 그렸다. 이 그림은 1888년이나 1889년, 잉글랜드 버크셔의 캘콧 밀에서 그렸고, 앞쪽 인물은 화가의 여동생 바이올렛, 뒤쪽은 함께 산책하던 친구다. 메트는 이 캔버스를 미완성으로 기록한다.

멀리서 보면 앞쪽 치마는 흰색이다. 확대하면 그 흰색은 위에서 아래로 길게 내린 세로 붓질 여러 개로 이루어져 있고, 붓질마다 색이 다르다. 주름이 들어간 곳에는 옅은 라일락빛 파랑이 섞였고, 그 사이로 황토색과 갈색 줄이 아래로 흘러내린다. 왼쪽 나무줄기와 길에 쓰인 바로 그 갈색이다. 치맛단 가까이 풀이 닿는 자리에는 초록 기가 돈다. 양산은 청회색과 초록이 섞인 옅은 면이다. 뒤쪽 인물의 옷은 그늘 속에 있어 앞쪽보다 훨씬 회색이고, 그 위에 밝은 곡선 붓질 하나가 빛을 얹는다. 같은 흰 옷이 빛을 받는 자리와 그늘에서 서로 다른 흰색으로 칠해진 셈이다. 그림 맨 아래에는 물감이 닿지 않은 띠가 남아 있는데, 미완성이라는 기록과 맞는다.
《초록 문,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세 가지 흰색이 섞인 기둥
메트의 해설에 따르면 사전트는 1904년 무렵 베네치아의 바로크 성당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를 여러 번 그렸다. 잘 알려진 그림들은 건축 세부를 꼼꼼히 기록했지만, 이 수채화는 정문을 속기하듯 빠르게 그렸고, 사전트가 세상을 떠난 뒤 작업실에 남아 있던 실험적인 작품 가운데 하나다.

가운데 짙은 초록 문이 화면을 무겁게 누르고, 양옆 기둥이 흰빛으로 그 문을 감싼다. 기둥을 확대하면 흰색이 매끈하지 않다. 갈색 물감이 지나간 자리 군데군데에 흰 알갱이가 종이 결을 따라 부스러지듯 박혀 있다. 이 흰색이 무엇인지는 그림만 보고 단정하기 어렵다. 메트의 재료란은 수채와 흑연 말고도 구아슈와 밀랍 크레용을 적는다. 그러니 이 흰 알갱이는 물감이 건너뛴 종이일 수도, 크레용을 그은 자리에서 물감이 끊긴 것일 수도, 불투명한 흰 구아슈를 위에 얹은 것일 수도 있다. 아래쪽 계단은 더 단순하다. 연보라 가로 띠를 여러 번 긋고, 띠와 띠 사이를 칠하지 않은 채 두었다. 그 빈 줄이 계단 모서리에 닿는 빛이 된다.
《스페인의 한낮, 아랑후에스》: 칠하지 않은 흰색
메트에 따르면 이 수채화는 스페인 아랑후에스의 궁전 앞 공원을 그린 것으로, 특유의 대리석 벤치로 장소를 알아볼 수 있다. 사전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오래 버려진 분수와 조각상, 동굴 같은 가로수 길이 있는 정원을 반겼다. 작품 기록의 연도는 1903년이지만, 같은 기록에 실린 도록 해설은 그가 1903년 무렵과 1912년에 이곳을 찾았고 이 구도는 1912년에 그렸을 가능성이 크다고 적는다.

오른쪽에서 잘린 벤치가 화면 가운데로 깊이 물러나고, 그 위를 진한 초록과 노란빛 나뭇잎이 덮는다. 이 그림의 재료란에는 수채와 흑연만 있다. 흰 구아슈가 없으니, 햇빛 받은 벤치 면의 밝은 크림색은 칠한 색이 아니라 종이 그대로의 색이다. 확대하면 그 빈 면 위에 연필 선이 가늘게 지나가며 판의 테두리를 잡고, 몰딩의 그늘만 옅은 회보라 물감으로 얹혀 있다. 한 판에는 살구빛이 세로로 옅게 번졌다. 메트도 이 벤치를 두고, 흑연으로 몇 군데 윤곽을 잡은 뒤 옅은 물감으로 몰딩과 장식의 그늘을 그렸다고 설명한다. 밝은 곳에 무엇을 더한 것이 아니라, 그늘만 칠하고 빛은 남겨 두었다.
괴테의 색 그림자: 흰 면은 빛의 색을 받는다
흰색이 그 자체로 색을 띤다는 관찰은 사전트보다 앞서 글로 남아 있다. 괴테는 1810년의 『색채론』에서 색 그림자를 다루며 두 가지 조건을 적었다. 주된 빛이 흰 면을 어떤 색으로 물들일 것, 그리고 반대쪽 빛이 드리운 그림자를 어느 정도 비출 것. 그는 흰 종이가 불그스름한 노랑으로 작용하고, 그 보색인 파랑이 눈에서 일어난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겨울 하르츠를 여행하다 저녁 무렵 브로켄산을 내려오던 기억을 적었다. 낮에는 눈이 노르스름해 그림자가 보라 쪽으로 기울었는데, 해가 낮아져 빛을 받은 곳이 주황으로 짙어지자 그림자는 뚜렷한 파랑이 되었고, 해가 지기 직전 붉은빛이 퍼지자 그림자는 에메랄드 같은 초록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사전트가 괴테를 읽고 이렇게 그렸다는 기록은 없다. 그래도 괴테의 구분은 네 점을 나누어 보는 데 쓸모가 있다. 두 유화에서 사전트는 흰 면 자체에 빛과 주변의 색을 섞었다. 눈은 보랏빛 회색이고, 흰 치마에는 길의 갈색과 풀의 초록이 흘러들었다. 두 수채화에서는 반대로 종이가 빛을 받는 흰 면으로 남고, 색은 그늘에만 들어간다. 따뜻한 종이색 옆에 놓인 회보라 그늘과 연보라 계단은 괴테가 눈밭에서 본 배치, 곧 노르스름한 밝은 면과 보랏빛 그림자에 가깝다. 유화에서는 흰색을 섞어서 만들고, 수채화에서는 흰색을 남겨서 만든다. 같은 화가가 같은 문제를 두 재료로 다르게 푼 것이다.
흰색 앞에서 물어볼 세 가지
다음에 그림 속 흰 옷이나 눈, 하얀 벽을 만나면 먼저 그 자리를 확대하거나 가까이 가서 그 흰색에 섞인 색을 하나씩 이름 붙여 본다. 보라인지, 황토인지, 옆 물건의 색인지. 다음으로 그 흰색이 위에 얹혀 두껍게 솟아 있는지, 아래 바탕이 비어 있는 것인지 본다. 마지막으로 미술관 작품 기록의 재료란을 읽는다. 수채화에 구아슈나 크레용이 적혀 있지 않다면, 가장 밝은 자리는 종이일 가능성이 크다. 이 세 가지를 확인하고 나면 같은 흰색이 왜 어떤 그림에서는 무겁고 어떤 그림에서는 빛처럼 가벼운지 설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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