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의 그림은 멀리서 보아도 알아볼 수 있다. 물감을 두껍게 얹은 짧은 붓 자국이 화면 전체를 덮고, 그 자국 하나하나가 어딘가를 향해 누워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붓 자국은 무엇을 따라 방향을 정했을까. 사물의 모양일까, 바람일까, 아니면 화가의 손 버릇일까.
이 글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퍼블릭 도메인으로 공개한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 네 점을 1887년, 1888년, 1889년 순서로 놓고 붓 자국의 방향과 종류를 따라간다. 다 읽고 나면 고흐의 그림 앞에서 한 구역을 정해 붓 자국이 어느 쪽으로 누웠는지 눈으로 따라가 보고, 자국의 종류가 바뀌는 자리에서 한 사물이 끝나고 다른 사물이 시작된다는 것을 스스로 짚어 볼 수 있다.
빈센트 반 고흐(1853–1890)는 네덜란드 쥔더르트에서 태어나 프랑스 오베르쉬르우아즈에서 세상을 떠났다. 화가로 일한 기간은 1880년부터 1890년까지 십 년 남짓이다. 네 점은 그 마지막 몇 해, 파리와 아를과 생레미에서 나왔다.
1887년 파리: 짧은 터치가 모양을 따라 눕는다
고흐는 1886년 2월부터 1888년 2월까지 파리에서 지냈다. 메트의 설명에 따르면 그는 이곳에서 인상주의 그림을 직접 보았고, 쇠라와 시냐크 같은 신인상주의 화가들이 작은 색점을 나란히 찍는 방식도 지켜보았다. 그 뒤로 팔레트가 밝아지고, 붓질이 짧게 끊어졌다. 1887년 여름에 그린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은 그 변화를 보여 주는 그림이다. 이 캔버스는 1885년에 그린 농민 습작 《감자 깎는 사람》의 뒷면을 뒤집어 다시 쓴 것이다.

얼핏 보면 짧은 터치가 화면 전체에 고르게 흩어진 것 같다. 하지만 부분마다 터치가 눕는 방향이 다르다. 모자 챙에서는 노란 붓질이 챙의 곡선을 따라 가로로 돌고, 턱수염에서는 노랑과 주황 붓질이 아래로 떨어진다. 재킷은 파랑과 초록, 노랑의 긴 붓질이 비스듬히 아래로 흐른다. 얼굴을 확대해 보면 광대뼈 위에서 노랑·분홍·초록 터치가 볼의 둥근 면을 따라 휘어 있다.
배경은 더 흥미롭다. 갈색 캔버스 바탕이 그대로 드러난 자리 위에 주황, 푸른 회색, 옅은 분홍의 짧은 터치가 성기게 얹혀 있는데, 머리 양옆에서는 이 터치들이 비스듬히 기울며 머리를 중심으로 둥글게 휘어 도는 것처럼 보인다. 배경에는 모양이 없으니 따라야 할 윤곽도 없다. 그런데도 방향이 생겼다. 이 그림에서 터치의 길이는 신인상주의에서 빌려 온 것이지만, 터치의 방향은 이미 고흐가 정하고 있다.
1888년 아를: 색 없이 표시만으로 거리를 나누다
1888년 2월 고흐는 남프랑스 아를로 옮겼다. 메트의 설명은 그가 아를에서 갈대 펜으로 그린 소묘들이 선의 활력과 다양한 고안으로 두드러지며, 그가 모으던 일본 우키요에 판화에 빚을 졌다고 쓴다. 1888년 7월의 소묘 《밀밭》이 그런 그림이다. 연필로 밑그림을 잡고 그 위에 갈대 펜과 로그우드 잉크로 그렸고, 지금 화면에서는 잉크가 갈색으로 보인다.

색이 없으니 이 그림에서 거리를 알려 주는 것은 표시의 종류뿐이다. 맨 앞에서는 길게 휘는 획과 고리, 풀포기처럼 한 점에서 퍼지는 획이 섞여 있다. 그 위 띠에서는 짧은 갈고리와 작은 동그라미가 이어진다. 더 멀리 밭 한가운데로 가면 획이 짧아져 점이 되고, 점은 위로 갈수록 작고 촘촘해진다. 지평선 근처 언덕은 가늘고 가지런한 가로선 몇 줄로만 그어져 있고, 하늘은 종이를 비워 두었다.
여기서 하나가 보인다. 방향은 가까운 곳에만 있다. 앞쪽 획은 비스듬히 눕거나 휘면서 바람에 쓸린 풀처럼 읽히지만, 가운데의 점에는 방향이 없고, 먼 언덕의 가로선은 방향이라기보다 층을 나누는 선이다. 고흐는 표시의 크기만 줄인 것이 아니라 종류를 바꾸어 거리를 그렸다. 이 방식은 이듬해 유화에서 색과 함께 다시 나타난다.
1889년 생레미: 구역마다 다른 붓질
1888년 12월 발작을 겪은 뒤, 고흐는 1889년 5월 아를 근처 생레미의 요양원에 스스로 들어갔다. 6월에는 요양원 밖으로 나가 삼나무를 그리기 시작했다. 《삼나무가 있는 밀밭》은 같은 6월, 밭 앞에서 직접 그린 그림이다. 메트의 보존 기록에 따르면 물감 속에 밀 껍질 한 조각이 박혀 있었는데, 이는 그림을 밭 앞에서 그렸다는 물리적 흔적이다. 고흐는 7월 2일 동생 테오에게 이 구도를 갈대 펜 소묘로 그려 보냈고, 이 그림을 여름에 그린 풍경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의 하나로 꼽았다. 이때의 갈대 펜 소묘는 지금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에 있으며, 위의 1888년 《밀밭》과는 다른 그림이다.

화면 위쪽 절반 넘게 하늘이 차지하고, 그 아래 푸른 산줄기가 물결처럼 지나며, 아래쪽 3분의 1은 노란 밀밭이다. 오른쪽에서 짙은 초록 삼나무가 위 가장자리 가까이까지 솟는다. 붓 자국은 구역마다 종류가 다르다. 하늘은 넓게 휘는 붓질이 소용돌이를 만들고, 흰 구름에서 물감이 가장 두껍다. 삼나무는 좁고 짧은 붓질이 위를 향해 깜박이듯 겹친다. 밀밭은 비스듬한 빗금이 박자를 맞추듯 이어지고, 오른쪽 아래 풀밭은 고리 모양 붓질로 말린다. 왼쪽 올리브나무는 덩어리진 물감이 뭉쳐 있다.
메트의 보존 기록도 같은 구분을 적고 있다. 하늘은 넓게 휘는 붓질, 삼나무는 더 좁고 흔들리는 붓질, 밀 줄기는 리듬 있는 빗금, 앞쪽 풀은 글씨 쓰듯 그린 고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구역마다 다른 붓질은 반 고흐 미술관의 갈대 펜 소묘에서 구역마다 다른 표시로 그대로 나타난다고 덧붙인다. 1888년 소묘에서 거리를 나누던 표시의 종류가, 1889년 유화에서는 사물을 나누는 붓질의 종류가 된 셈이다.
엑스선 사진은 순서도 알려 준다. 고흐는 삼나무 자리를 비워 두고 하늘을 칠한 뒤, 나무의 가장자리를 하늘 위에 덧칠했다. 그래서 확대해 보면 삼나무의 윤곽은 매끈한 선이 아니라, 위로 뻗은 짧은 초록과 검정 붓질이 하늘의 휘는 붓질 위로 삐죽삐죽 올라탄 모양이다. 나무와 하늘을 가르는 것은 색보다 붓질의 방향이다.
《삼나무》: 가만히 선 나무가 타오르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
같은 6월 말, 고흐는 삼나무를 가까이에서 세로 화면에 그린 그림을 두 점 남겼다. 하나는 오테를로의 크뢸러뮐러 미술관에, 다른 하나가 메트의 《삼나무》다. 그는 이 나무를 선과 비례가 아름다워 이집트 오벨리스크 같다고 썼고, 햇빛 가득한 풍경 속의 어두운 얼룩이라서, 가장 흥미로우면서도 정확히 맞히기 가장 어려운 어두운 음이라고도 했다. 이 그림은 1890년 앵데팡당전에 출품되었다. 메트 기록에 따르면 그림 아래쪽 물감에는 작은 자갈 조각이 박혀 있다.

나무는 화면 왼쪽 3분의 2를 채우고, 꼭대기는 위 가장자리에서 잘린다. 나무 전체가 화면 밖으로 이어지니 끝이 보이지 않는다. 나무 안쪽의 붓질은 위로만 향하지 않는다. 짙은 초록, 올리브색, 노란 초록의 붓질이 S자와 C자로 말리며 서로 엇갈리고, 사이사이 검은 선이 그 굴곡을 따라간다. 오른쪽 가장자리에서는 혀처럼 끝이 뾰족한 붓질이 하늘로 튀어나와 있다. 오른쪽 위에는 노란 초승달이 걸려 있고, 하늘은 청록 바탕 위에 옅은 분홍과 흰색의 둥근 소용돌이로 덮여 있다. 오른쪽 아래에는 푸른 산이 비스듬히 내려온다.
《삼나무가 있는 밀밭》에서는 붓질의 종류가 사물을 갈랐다. 여기서는 나무와 하늘이 모두 휘는 붓질로 칠해져, 종류보다 리듬의 차이가 경계를 만든다. 하늘의 소용돌이는 넓고 느리게 돌고, 나무의 붓질은 짧고 빠르게 말린다. 그래서 나무가 정지한 물체보다는 위로 올라가며 꿈틀거리는 덩어리로 보인다.
보는 사람의 몸이 붓질을 따라 움직인다
가만히 서 있는 나무가 왜 타오르는 것처럼 보일까. 19세기 독일 미학에는 이 물음에 맞는 개념이 있다. 감정이입, 곧 아인퓔룽(Einfühlung)이다. 미학자 테오도어 립스(1851–1914)는 우리가 대상의 형태를 볼 때, 몸을 움직일 때 느끼는 것과 비슷한 내적 움직임이 일어나고, 주의가 대상에 쏠려 있으므로 그 움직임을 대상 안에 있는 것으로 느낀다고 설명했다. 이 독일어 낱말은 1909년 심리학자 티치너가 영어 empathy로 옮겼다.
립스의 이론은 지각에 대한 한 가지 설명일 뿐이고, 고흐가 그것을 알고 그렸다는 증거도 없다. 다만 고흐의 붓 자국 앞에서는 이 설명이 잘 들어맞는다. 붓 자국은 손이 지나간 길이고, 그 방향이 화면에 그대로 남아 있다. 보는 사람의 눈은 그 길을 다시 밟는다.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의 배경 터치를 따라가면 시선이 머리 쪽으로 감기고, 《밀밭》의 앞쪽 획을 따라가면 풀이 기울며, 《삼나무》의 말리는 붓질을 따라가면 나무가 위로 올라간다. 움직임은 나무에 있지 않고, 붓질을 다시 밟는 우리 쪽에서 생긴다.
고흐 그림 앞에서 해 볼 것
고흐의 그림을 다시 보게 되면, 화면 전체를 한꺼번에 보지 말고 한 구역만 고른다. 하늘이든 밭이든 얼굴이든 좋다. 그 안에서 붓 자국 몇 개를 골라 어느 쪽으로 누웠는지 눈으로 따라간다. 그다음 붓 자국의 종류가 바뀌는 곳을 찾는다. 빗금이 고리로, 긴 획이 점으로, 넓은 소용돌이가 짧은 불꽃으로 바뀌는 바로 그 자리가 고흐가 한 사물을 끝내고 다른 사물을 시작한 곳이다. 윤곽선을 찾는 대신 붓질의 방향과 종류가 갈리는 곳을 찾으면, 고흐가 무엇을 하나의 덩어리로 보았는지가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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