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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0/10 UPDATE

CLASSICS / FIELD NOTES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사르트르는 왜 시를 ‘참여’에서 빼 놓았을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번, 장폴 사르트르 『문학이란 무엇인가』 읽기 안내. 참여 문학을 말한 사르트르가 왜 시와 그림과 음악에는 참여를 요구하지 않았는지 1장의 구분으로 설명하고, 팽이에 비유한 읽기, 독자의 역사, 1947년 작가의 상황까지 네 장의 흐름과 읽으면서 표시해 둘 것을 정리했습니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번은 소설이 아니라 비평서, 장폴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다. ‘참여 문학’이라는 말과 함께 기억되는 책인데, 막상 펼치면 첫 장에서 사르트르는 시와 그림과 음악에는 참여를 요구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참여를 외친 사람이 왜 시부터 빼 놓았을까. 이 글을 읽고 나면 그 이유를 1장의 한 가지 구분으로 설명할 수 있고, 네 장이 그 구분에서 어떻게 독자와 독자의 역사, 1947년의 현재로 넓어지는지 따라가며 읽을 수 있다.

어떤 책인가

원제는 『Qu'est-ce que la littérature?』다. 사르트르가 1945년에 창간한 잡지 《현대(Les Temps modernes)》에 1947년부터 나뉘어 실렸고, 1948년 갈리마르에서 낸 평론집 『상황 2』에 묶였다. 민음사판은 1998년 8월에 나왔고 456쪽이며, 정명환이 옮겼다. 출판사는 이전에 나온 번역본 대부분에 빠져 있던 4부 「1947년 작가의 상황」까지 옮긴 완역이고, 약 500개의 각주를 달았다고 소개한다. 차례는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한 글쓰기인가」,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 「1947년 작가의 상황」의 네 장이다.

사르트르는 1905년 파리에서 태어났다. 고등사범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2차 세계 대전에 나갔다가 포로가 되어 1941년에 풀려났다. 『구토』(1938)와 『존재와 무』(1943)를 쓴 소설가이자 철학자였고, 전쟁이 끝난 뒤 《현대》를 중심으로 작가의 사회적 책임을 주장했다. 1964년 노벨 문학상을 거절했고 1980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 책은 저작권이 살아 있는 작품이라 이 글에서는 내용을 풀어서 소개하고, 인용은 한 문장만 프랑스어에서 직접 옮겼다.

독서 노트

『문학이란 무엇인가』의 네 장

무엇을, 왜, 누구에게, 지금 어디서

  1. 1장 ·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 산문을 시·그림·음악과 가른다
    • 산문가는 말을 기호로 써서 세계를 드러낸다
  2. 2장 · 무엇을 위한 글쓰기인가

    • 작품은 읽히는 동안에만 있다
    • 쓰기는 독자의 자유에 보내는 호소
  3. 3장 · 누구를 위하여 쓰는가

    • 실제 독자와 잠재적 독자를 나눈다
    • 중세부터 19세기까지 작가와 독자의 관계
  4. 4장 · 1947년 작가의 상황

    • 세 세대의 작가와 초현실주의 비판
    • 관조(엑시스)에서 실천(프락시스)으로

1947년 《현대》에 연재, 1948년 『상황 2』에 수록. 장 제목은 민음사판 차례.

네 장은 쓰기의 정의에서 출발해 독자, 독자의 역사, 1947년의 현재로 범위를 넓혀 간다. 출판사에 따르면 이전 번역본 대부분에 빠져 있던 4장이 민음사판에는 들어 있다.
숏츠로 보기 ·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009 | 문학이란 무엇인가YouTube ↗

1장의 구분: 말을 쓰는가, 말을 다루는가

1장은 산문을 다른 예술과 떼어 놓는 데서 시작한다. 화가에게 색은 무언가를 가리키는 기호가 아니다. 사르트르는 틴토레토가 골고다 위 하늘의 노란 찢김을 불안을 뜻하거나 불러일으키려고 고른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 노랑은 불안의 기호가 아니라, 사물이 되어 버린 불안이다. 음악의 음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화가나 음악가에게 참여하라고 요구할 수 있겠느냐고 그는 묻는다.

시인도 이쪽에 선다. 시인에게 말은 세계를 가리키는 투명한 유리가 아니라 소리와 모양과 무게를 가진 사물이다. 시인은 말을 안쪽에서 바깥으로 뒤집어 보듯 만지고 시험한다. 반대로 산문가는 말을 기호이자 도구로 쓴다. 산문가는 말하는 사람이고, 가리키고 보여 주고 명령하고 거부한다. 사르트르는 이 차이를 한 문장으로 줄인다. “산문은 말을 사용하고, 시는 말을 섬긴다.”

질문의 답이 여기 있다. 참여는 말을 기호로 써서 세계의 무언가를 가리키는 사람에게만 요구할 수 있다. 말하는 것은 곧 행동하는 것이고, 이름이 붙은 것은 이미 이전과 똑같지 않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는 산문가가 ‘드러냄을 통한 행동’을 고른 사람이라고 부르고, 작가가 하는 일은 누구도 세계를 모른다고 할 수 없게, 누구도 자기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라고 쓴다. 시를 뺀 것은 시가 덜 중요해서가 아니라, 시가 말로 하는 일이 다르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독서 노트

말을 기호로 쓰는가, 사물로 다루는가

사르트르가 참여를 산문에만 요구하는 이유

  • 산문가 · 말을 사용한다

    • 말은 세계를 가리키는 기호, 도구다
    • 가리키고, 보여 주고, 명령하고, 거부한다
    • 이름을 붙이면 그것은 이미 바뀌기 시작한다
  • 시인 · 화가 · 음악가

    • 시인은 말을 기호가 아니라 사물로 다룬다
    • 틴토레토의 노란 하늘은 불안의 기호가 아니다
    • 사물이 되어 버린 불안, 하늘의 노란 찢김이다

"산문은 말을 사용하고, 시는 말을 섬긴다." 프랑스어 원문을 필자가 옮김.

참여는 말을 기호로 쓰는 사람에게만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이 1장의 논리다. 시를 깎아내리는 말이 아니라 하는 일이 다르다는 말이다.

2장: 작품은 읽히는 동안에만 있다

2장은 왜 쓰는가를 묻는다. 사르트르의 출발점은 단순하다. 구두장이는 자기가 만든 구두를 신어 볼 수 있지만, 작가는 자기가 쓴 글을 읽을 수 없다. 쓴 사람은 다음 문장을 이미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학 작품은 팽이와 같다. 돌고 있는 동안에만 있고, 읽는 행위가 멈추면 종이 위의 검은 자국만 남는다.

읽기는 그래서 ‘이끌린 창조’다. 독자는 작가가 남긴 표시를 따라가지만, 쓰이지 않은 것을 끊임없이 채워 넣으며 작품을 세운다. 작가는 그 일을 독자에게 강요할 수 없고 부탁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쓴다는 것은 독자의 자유에 보내는 호소이고, 읽기는 작가와 독자가 서로를 믿고 서로에게 요구하는 ‘관대함의 계약’이 된다. 1장이 산문을 행동으로 정의했다면, 2장은 그 행동이 독자의 자유 없이는 완성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자유로운 사람이 자유로운 사람에게 쓰는 글이라면, 그 글이 다룰 주제도 결국 자유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 장의 결론이다.

3장과 4장: 누구에게 읽혀 왔고, 지금은 누구인가

3장은 같은 생각을 역사에 적용한다. 작가에게는 실제로 그를 읽는 독자가 있고, 읽을 수도 있었을 잠재적 독자가 있다. 12세기의 성직자는 같은 성직자를 위해서만 썼기 때문에 둘 사이에 틈이 없었고, 자기 시대의 이념을 흔들 일도 없었다. 17세기 작가의 독자는 궁정과 성직자, 법관, 부유한 부르주아로 이루어진 ‘사교계’였다. 18세기는 기우는 귀족과 떠오르는 부르주아 사이에서 작가가 두 독자층을 동시에 상대한 시기로, 사르트르는 이 시대를 프랑스 작가들의 다시 없을 황금기라고 부른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면 문학은 파괴를 내세우며 사회와 이어진 끈을 끊고, 끝내 독자마저 잃는다.

독서 노트

작가는 누구를 위해 써 왔나

3장이 그리는 프랑스 작가와 독자의 역사

  1. 12세기 · 성직자가 성직자에게

    • 성직자는 같은 성직자만을 위해 쓴다
    • 실제 독자와 잠재적 독자의 구분이 없다
  2. 17세기 · '사교계'

    • 궁정, 성직자, 법관, 부유한 부르주아
    • 독자는 교양 있는 비평가이기도 하다
  3. 18세기 · 작가들의 황금기

    • 기우는 귀족과 떠오르는 부르주아 사이
    • 두 독자층의 요구가 처음부터 긴장 속에 있다
  4. 19세기 후반 · 파괴의 문학

    • 문학은 사회와 이어진 끈을 모두 끊는다
    • 그리고 독자마저 잃는다

사르트르의 역사 서술은 프랑스 문학에 한정되어 있다.

3장은 시대마다 작가가 실제로 누구에게 읽혔는지를 따라간다. 중세의 성직자 작가는 같은 성직자에게만 썼기에 양심이 편할 수 있었다는 것이 사르트르의 관찰이다.

4장은 이 이야기를 1947년으로 가져온다. 사르트르는 당시 활동하던 작가들을 세 세대로 나누어 살피고, 초현실주의가 내세운 파괴가 실제로는 머릿속에만 머물렀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바라보기만 하는 관조(엑시스)의 문학에서 행동하는 실천(프락시스)의 문학으로 옮겨 가자고 한다. 라디오와 영화 같은 새 매체 때문에 작가가 읽히기보다 알려지는 시대가 되었다는 진단도 이 장에 있다. 이 장은 1947년 프랑스라는 날짜와 장소에 묶인 상황 보고서라서, 당시 이름들이 많이 나온다. 민음사판의 각주가 가장 쓸모 있는 곳도 여기다.

읽으면서 표시해 둘 것

첫째, ‘자유’라는 말이 나올 때마다 누구의 자유인지 적어 두자. 작가의 자유, 독자의 자유, 작품 속 인물의 자유가 같은 낱말로 나온다. 2장의 논리는 이 셋이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데 있다.

둘째, 기술(記述)과 요구를 나누어 읽자. 3장의 역사 서술은 사실 판단처럼 쓰여 있지만, 4장에서 작가가 해야 할 일로 바뀐다. 어디서부터 ‘이랬다’가 ‘이래야 한다’가 되는지 표시해 두면 사르트르의 주장이 어디에 기대고 있는지 보인다.

셋째, 시에 대한 대목을 1장에서 끝내지 말자. 사르트르는 시인을 참여의 요구에서 빼 주었지만, 산문가에게는 그 핑계를 허락하지 않는다. 문체가 아름다워도 내용을 앞서서는 안 된다는 그의 생각은 1장 곳곳에 흩어져 있다.

한 가지만 해 본다면

오늘 읽은 기사나 소설에서 한 문단을 골라, 그 문단이 무엇에 이름을 붙이고 있는지, 그 이름이 붙은 뒤 독자인 내가 무엇을 모른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는지 적어 보자. 그 질문에 답할 수 있다면 그 문단은 사르트르가 말한 산문이고, 답이 떠오르지 않고 문장의 소리와 모양만 남는다면 그 문단은 시 쪽에 서 있다. 1장의 구분을 이렇게 손에 쥐고 2장으로 넘어가면, 나머지 세 장은 그 구분이 독자와 역사로 넓어지는 과정으로 읽힌다.

끝 · END OF NOTE목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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