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BOX

'26/11/03 UPDATE

ART / FIELD NOTES

고린의 병풍에서 금박은 땅일까, 물일까

오가타 고린의 《야쓰하시의 붓꽃》에는 다리가 있는데 물이 없다. 금박뿐이다. 경계선을 따라 병풍 세 점을 읽으면 같은 금빛이 땅과 물, 파도와 공기를 오가고, 금박 없는 밑그림 한 점이 비교 대상이 된다. 금빛 앞에서 짚어 볼 세 가지도 정리한다.

금박 병풍을 볼 때 우리는 금빛을 흔히 배경이라고 부른다. 오가타 고린의 《야쓰하시의 붓꽃》 앞에서는 그 말이 금방 막힌다. 화면을 가로지르는 나무다리는 물 위에 놓여 있어야 할 텐데, 다리 밑에 물이 없다. 금박뿐이다. 그렇다면 그 금박은 땅일까, 물일까.

금빛 바탕의 한 지점을 짚고, 그 둘레에 또렷한 경계선이 있는지, 무엇이 그 위를 덮고 지나가는지를 보면 그 자리가 지금 무엇 노릇을 하는지 읽을 수 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클리블랜드 미술관이 공개한 병풍 세 점과 금박 없는 밑그림 한 점으로 그 읽는 법을 익혀 본다.

오가타 고린(1658–1716)은 교토의 직물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집안이 가지고 있던 다와라야 소타쓰와 혼아미 고에쓰의 작품을 꼼꼼히 공부했고, 선배들보다 더 추상적이고 단순한 화면을 만들었다. 에도 시대의 장식적인 회화 양식을 가리키는 린파(琳派)라는 이름도 그의 이름에서 왔다. 다만 메트의 에세이에 따르면 린파는 조직을 갖춘 유파나 대물림된 화파가 아니라 비슷한 양식으로 그린 사람들을 묶은 말이다.

다리는 있는데 물이 없다

《야쓰하시의 붓꽃》은 여섯 폭 병풍 한 쌍이고, 여기에는 그중 한 점을 실었다. 장면의 출처는 『이세 이야기』다. 교토에서 쫓겨난 주인공이 시내가 여덟 갈래로 갈라져 갈래마다 다리가 놓인 야쓰하시에 이르러, 붓꽃을 보고 두고 온 사람을 그리는 시를 짓는다. 시의 각 구 첫 음절을 이으면 붓꽃을 뜻하는 ‘가키쓰바타’가 된다.

오가타 고린의 여섯 폭 병풍 《야쓰하시의 붓꽃》 한 점. 금박 바탕 위로 짙은 회색 나무다리가 꺾이며 왼쪽 아래에서 오른쪽 위로 비스듬히 지나가고, 다리 아래로 격자 모양 받침이 보인다. 다리 양쪽에 파란 붓꽃과 초록 잎이 무리 지어 있다. 물은 그려져 있지 않고, 잎의 밑동은 땅을 나타내는 선 없이 금박 위에서 끝난다.
오가타 고린, 《야쓰하시의 붓꽃》(Irises at Yatsuhashi (Eight Bridges)), 1709년 이후, 여섯 폭 병풍 한 쌍, 종이에 금박, 먹과 채색, 병풍마다 화면 163.7 × 352.4 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Purchase, Louisa Eldridge McBurney Gift, 1953, 53.7.1, .2. 이미지는 한 쌍 중 한 점. 퍼블릭 도메인(The Met Open Access, CC0). 메트 작품 기록

그런데 여덟 갈래 시내는 그림에 없다. 파랑은 꽃에, 초록은 잎에 쓰였고 다리 받침에 청록빛 얼룩이 조금 있을 뿐, 물을 나타내는 색도 선도 보이지 않는다. 물의 존재를 알려 주는 것은 짙은 회색 다리와 그 아래 격자 모양 받침뿐이다. 다리는 꺾이면서 왼쪽 가장자리에서 오른쪽 위로 올라가 위쪽 가장자리에서 끊긴다. 잎의 밑동도 땅을 나타내는 선 없이 금박 위에서 그대로 끝난다. 다리 아래의 금박은 물이어야 하고, 붓꽃 아래의 금박은 땅이거나 얕은 물이어야 한다. 가키쓰바타는 습지와 얕은 물에서 자라는 붓꽃이다. 그런데 둘 사이에 경계가 없다. 시를 지은 주인공도 이 한 점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금박 자체도 깊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메트의 사진을 확대해 보면 금박 조각의 네모난 이음매가 바둑판처럼 드러나고, 병풍의 세로 접힘 선이 그 위를 지나간다. 물이나 땅으로 읽으려는 순간 눈앞에 있는 것은 다시 판판한 금속 조각이 된다.

금박이 파도의 몸이 될 때

《거친 파도》는 두 폭짜리 병풍이다. 연대로는 앞의 그림보다 먼저이고 재료는 거의 같은데, 금박이 하는 일은 다르다. 짙은 청록빛 어둠이 화면을 가로지르고, 파도는 그 어둠 안에 남겨진 금빛으로 나타난다. 파도의 몸통에는 먹으로 가는 물결선을 그었을 뿐, 몸통 자체는 바탕의 빛깔이 올라온 것처럼 보인다.

오가타 고린의 두 폭 병풍 《거친 파도》. 금박 바탕을 짙은 청록빛 어둠이 가로지르고, 그 안에서 금빛 그대로의 파도가 집게발처럼 말려 오른쪽 위와 왼쪽 아래에서 솟는다. 파도의 가장자리는 또렷하지만 어둠의 위쪽 끝은 금박 속으로 번져 사라진다. 오른쪽 위에 서명과 둥근 인장이 있고, 금박 곳곳에 밝게 갈라진 선이 보인다.
오가타 고린, 《거친 파도》(Rough Waves), 1704–09년경, 두 폭 병풍, 종이에 먹과 채색, 금박, 화면 146.5 × 165.4 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Fletcher Fund, 1926, 26.117. 퍼블릭 도메인(The Met Open Access, CC0). 메트 작품 기록

눈여겨볼 곳은 경계선이다. 파도가 어둠과 만나는 곳은 칼로 자른 듯 또렷하다. 끝이 말린 거품과 구멍 뚫린 물마루까지 윤곽이 분명하다. 반면 어둠의 위쪽 끝과 화면 가운데 끝은 금박 속으로 번져 사라진다. 그래서 같은 금빛이 아래에서는 파도의 몸이 되고, 위에서는 하늘인지 물안개인지 정해지지 않은 채 남는다.

메트의 설명에 따르면 이 병풍은 셋손 슈케이(1504년경–1589년경)의 파도 그림에서 영감을 얻었을 수 있고, 집게발 같은 파도의 윤곽선은 한 손에 붓 두 자루를 쥐고 그리는 옛 중국 기법으로 그렸다. 셋손은 무로마치 시대의 선승 화가다. 오른쪽 위의 인장은 고린이 1704년부터 쓰기 시작한 이름 ‘도스’다. 금박 곳곳에 밝게 갈라진 선이 보이는데, 처음부터 있던 것인지 세월의 흔적인지는 사진만으로 가릴 수 없다.

금박이 없는 밑그림

《학, 소나무, 대나무》는 금박을 입히지 않은 종이에 그린 밑그림이다. 메트에 따르면 고린의 후손인 고니시 집안이 가지고 있던 스케치와 소묘 가운데 하나였던 것으로 여겨지고, 뒤에 병풍으로 다시 꾸몄다. 줄기 위쪽이 뭉개진 채 남은 소나무와 흐린 가지에 미완성의 흔적이 있다. 여기 실은 것은 네 폭인 오른쪽 병풍이다.

오가타 고린의 밑그림 《학, 소나무, 대나무》 가운데 네 폭 오른쪽 병풍. 금박 없는 옅은 종이 위에 붉은 머리의 학 두 마리, 비스듬한 소나무, 이끼 낀 바위, 붉은 꽃이 그려져 있다. 왼쪽 아래의 물은 색 없이 가는 먹선으로만 그려졌고, 그 위쪽 종이는 비어 있다. 종이를 이은 네모 선이 화면 전체에 보인다.
오가타 고린, 《학, 소나무, 대나무》(Cranes, Pines, and Bamboo), 18세기 초, 병풍 한 쌍으로 다시 꾸민 밑그림, 종이에 먹과 채색, 오른쪽 병풍(네 폭) 화면 167 × 257.2 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The Harry G. C. Packard Collection of Asian Art, Gift of Harry G. C. Packard, and Purchase, Fletcher, Rogers, Harris Brisbane Dick, and Louis V. Bell Funds, Joseph Pulitzer Bequest, and The Annenberg Fund Inc. Gift, 1975, 1975.268.62, .63. 퍼블릭 도메인(The Met Open Access, CC0). 메트 작품 기록

금박을 걷어 낸 화면에서는 바탕이 하는 일이 더 쉽게 보인다. 왼쪽 아래의 물에는 색이 없다. 소용돌이치는 가는 먹선을 겹쳐 놓았을 뿐이고, 선 사이는 종이 그대로다. 선이 멈춘 위쪽도 같은 종이인데 거기서는 더 이상 물로 보이지 않는다. 메트가 이 한 쌍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으로 꼽는 것도 보는 쪽으로 흘러나오는 시내의 배치다. 물이 물로 보이는 범위를 정하는 것은 바탕이 아니라 바탕 위에 놓인 선이다.

종이를 이은 듯한 네모 선이 화면 전체에 보이는 점도 금박의 이음매와 닮았다. 다만 이 밑그림의 연대는 ‘18세기 초’로만 적혀 있어서, 앞의 두 병풍보다 먼저인지 뒤인지는 말할 수 없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순서가 아니라, 같은 화가가 비어 있는 바탕을 어떻게 썼느냐다.

물에 색을 주자 금박이 갈라진다

마지막 병풍은 조심해서 봐야 한다. 클리블랜드 미술관은 《시냇가의 국화》를 ‘고린의 작품으로 추정’한다고 적고, 연대를 1715–30년경 또는 그 이후로 둔다. 미술관 설명에 따르면 이 병풍과 같은 서명이 있는 작품은 고린의 마지막 해나 그가 죽은 뒤에 만들어졌다고 보기도 하는데, 어느 쪽이든 일의 대부분은 공방 조수가 맡았을 것이라고 한다. 미술관은 후대의 화가가 고린의 도안을 본떠 만들었을 가능성도 함께 적는다. 그래서 이 한 점으로 고린의 손을 말할 수는 없지만, 그의 방식이 어떻게 이어졌는지는 볼 수 있다.

오가타 고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여섯 폭 병풍 《시냇가의 국화》 한 점. 금빛 바탕을 짙은 남색 시내가 왼쪽 아래에서 오른쪽 위로 둥글게 굽이치며 지나가고, 시내 안에는 금빛 물결선이 있다. 흰 국화와 초록 잎이 여러 포기 서 있다. 왼쪽 위의 포기는 시내 위쪽 금빛 바탕에서 시작하고, 가운데 포기는 시내 아래 금빛 둑에서 시작해 시내를 가로질러 올라간다.
오가타 고린 추정(Possibly by Ogata Kōrin), 《시냇가의 국화》(Chrysanthemums by a Stream), 1715–30년경 또는 그 이후, 여섯 폭 병풍 한 쌍 중 한 점, 금을 입힌 종이에 먹과 채색, 화면 163.2 × 369.9 cm. 클리블랜드 미술관, Gift of the Hanna Fund, 1958.206.1. CC0(Cleveland Museum of Art Open Access). 클리블랜드 미술관 작품 기록

여기서는 물이 짙은 남색 덩어리로 칠해져 있다. 《야쓰하시의 붓꽃》과 정반대다. 그러면 금박은 땅으로 정해질 것 같은데, 국화 줄기를 따라가 보면 그렇지 않다. 왼쪽 위의 포기는 시내 위쪽 금빛 바탕에서 밑동이 끝난다. 거기서 금박은 땅이다. 가운데 포기는 시내 아래 금빛 둑에서 시작해 남색 물을 가로질러 올라가, 시내 위쪽 금빛 앞에서 꽃을 피운다. 거기서 같은 금박은 공기다. 금빛은 남색 물속에도 가는 물결선으로 다시 나타난다.

경계선이 누구의 것인가

이 차이를 설명하는 데 쓸 만한 말이 있다. 고린보다 두 세기쯤 뒤인 1915년, 덴마크 심리학자 에드가 루빈이 꽃병과 두 얼굴이 번갈아 보이는 그림으로 정리한 ‘도형과 바탕’이다. 2012년에 나온 게슈탈트 심리학 개관 논문의 설명을 빌리면, 경계선은 한쪽 영역에 모양을 주고 그 영역은 도형으로 보이며, 옆 영역은 모양 없이 그 뒤로 이어지는 바탕처럼 보인다. 물론 고린이 알았을 리 없는 현대의 용어다.

이 말로 다시 보면 금박 병풍 세 점의 차이가 정리된다. 《거친 파도》에서 또렷한 경계선은 파도 쪽에 속하니 그 금빛은 도형이 되고, 경계가 번진 위쪽 금빛은 모양을 얻지 못한다. 《야쓰하시의 붓꽃》의 금박은 다리와 잎의 윤곽에 닿아 있지만 그 경계선은 모두 다리와 잎의 것이고, 금박 자신의 경계선은 없다. 그래서 물도 땅도 될 수 있다. 《시냇가의 국화》의 화면 아래쪽에서 시내와 금빛 둑이 둥글게 맞물리는 곳을 보면, 그 곡선은 물의 모양이면서 동시에 금빛 둑의 모양이어서 눈이 양쪽을 오간다. ‘장식적’이라는 말만으로는 이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

금빛 앞에서 짚어 볼 세 가지

금박 병풍을 만나면 꽃이나 다리보다 빈 금빛을 먼저 한 곳 고른다. 그리고 세 가지를 묻는다. 그 자리의 둘레에 또렷한 경계선이 있는가. 무엇이 그 위를 덮고 지나가는가. 바로 옆의 같은 금빛은 다른 일을 하고 있지 않은가. 메트 사진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면 처음 질문에는 이렇게 답하게 된다. 이 병풍들에서 금박은 땅도 물도 아니다. 옆에 어떤 선이 오느냐에 따라 그때그때 땅이 되고 물이 된다.

끝 · END OF NOTE
RSS 구독목록으로
COMMENTS BOX

이 기록에 대화를 더해 주세요.

궁금한 점, 다른 접근, 직접 해 본 결과를 나눠 주세요.

최신순

로그인 상태 확인 중…

댓글을 불러오는 중…